살구의 어원에서 복숭아의 욕망까지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읽기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속 살구와 복숭아가 상징하는 지적 유희와 욕망,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피부색 명칭 변경 역사를 살펴봅니다.

에디터나인·
#콜미바이유어네임#살구#복숭아#영화음식

흔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의 상징적인 과일로 복숭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복숭아 외에 다른 과일 하나가 더 언급됩니다. 바로 살구입니다. 복숭아와 살구는 둘 다 대표적인 여름 과일입니다. 복숭아는 흘러내릴 듯한 풍부한 과즙을 지녀 영화 후반부에 엘리오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대변하지만 살구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엘리오의 가족들이 올리버에게 종종 살구주스를 내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올리버와 엘리오의 아버지가 살구의 어원에 대해 가벼운 토론을 펼치는데, 이때 엘리오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엘리오는 처음으로 올리버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며시 미소를 짓는데요, 저는 이 장면이 엘리오가 올리버의 지적 매력에 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호기심을 넘어 둘 사이의 지적인 연결고리가 생긴 지점인 것입니다.

살구와 복숭아의 일러스트 이미지

한국어 살구의 어원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마음을 열게 된 계기인 살구의 어원을 찾는 지적 유희 과정을 한국어에서도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살구'는 15세기 문헌(훈민정음 해례본 등)에서 '살고'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순우리말(고유어)입니다. 한자로는 '살구 행(杏)'을 씁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살구를 한자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민간과 한의학에서는 살구를 '살구(殺狗)', 즉 '개를 죽이는 과일'이라는 한자어로 풀이하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살구씨(행인)에 있는 독성(아미그달린)이 개에게 치명적이어서 개가 먹으면 죽는다거나 살구나무 아래에 개를 묶어놓으면 개가 죽는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설은 아니지만 살구는 이렇게 한국에서 섬뜩한 한자어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살구와 색깔

살구는 색깔의 이름으로도 재미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살색(Flesh)에 관한 것인데요, 한국과 미국에서 둘 다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과거에 흔히 '살색'이라고 표현한 색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인간의 살, 피부색을 표현하는 색입니다. 이 살색은 크레파스나 여성들이 착용하는 스타킹의 색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인의 피부색을 이르는 표현이었지만 피부색을 하나의 색으로 규정하는 것이 인종차별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된 후 '연주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주황'이라는 말이 어린이들이 사용하기 직관적이지 않아 더 쉬운 한글 이름인 '살구색'으로 바뀌어 2005년부터 사용 중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apricot'의 한국어 '살구'의 앞글자인 '살'이 'flesh'를 이르는 한국어 '살'과 완벽하게 발음과 모양이 같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잘 익은 살구의 색상이 실제로 기존의 살색과도 유사한 것을 보면 '살구'라는 이름 자체가 '살'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기 좋은 방향입니다.

미국의 크레용 회사인 크레욜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특정 인종의 피부색을 기준으로 했던 살색(Flesh)이 사회적 약속에 의해 복숭아색(Peach)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피부색 명칭 변경의 차이

피부색의 이름을 변경함에 있어서 한국은 살구, 미국은 복숭아로 다른 과일을 선택했습니다. 먼저 크레욜라는 'Flesh'를 대체할 이름으로 'Apricot'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미 'Apricot'이라는 독립된 색상을 만들어 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Flesh'와 시각적으로 비슷하면서도 아직 크레파스 이름으로 쓰이지 않았던 'Peach(복숭아색)'를 대체어로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미국에서 복숭아(Peach)가 살색(Flesh)의 대체어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백인의 피부색에 감도는 붉은 기와 복숭아의 색감이 매칭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 문화권에서 '복숭아색'이라고 하면 흔히 연한 주황빛이 아니라 '분홍색(Pink)'을 떠올립니다. (예: 복숭아빛 뺨, 피치 핑크). 크레파스의 기존 '살색'은 노란빛이 도는 살갗 색이었으므로, 이를 분홍빛으로 인식되는 '복숭아색'으로 부르기보다 연한 주황빛의 '살구색'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 어울렸을 것입니다.

색상명Hex CodeR (빨강)G (초록)B (파랑)
미국 살구 (Apricot)#FDD5B1253213177
한국 살구색#FBCEB1251206177
미국 복숭아 (Peach)#FFCBA4255203164

복숭아와 금기

그렇다고 해도 복숭아색과 분홍색을 같다고 생각하거나 과일 살구가 우리의 피부색과 같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살구는 훨씬 노란색이고, 복숭아는 분홍색보다는 훨씬 밝고 하얀 느낌입니다. 살색에서 연주황색 그리고 살구색으로 넘어갈 당시 복숭아색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을까요?

저는 복숭아가 가진 시각적 형태와 은유가 아이들의 교구에 쓰이기에는 너무 관능적이라 배제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전 세계적인 밈(Meme)이나 이모티콘 생태계에서 복숭아는 엉덩이나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호로 소비됩니다.

복숭아 특유의 둥글고 풍만한 형태, 솜털이 덮인 부드러운 껍질, 그리고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흘러내리는 과즙은 다분히 육감적입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의 복숭아의 관능적인 표현이 대표적이지요. 어느 정도 보수적인 정서상, 아이들이 매일 손에 쥐고 도화지에 문지르는 크레파스에 이토록 육체적 메타포가 강렬한 과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무의식적인 껄끄러움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살구는 한국 문화권에서는 성적인 은유 대신 동요에서 언급되는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무해하고 서정적인 이미지를 갖습니다. 아이들의 크레파스 색 이름으로 살구는 복숭아보다 훨씬 안전한 선택지였던 셈입니다.

살구 일러스트 Rawpixel,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이성과 욕망 사이 — 두 개의 과일

엘리오와 올리버는 기성세대의 사회적 규범 앞에서 안전하면서도 무해한 살구의 지적 어원 뒤에서 자신들의 위태로운 감정을 숨깁니다. 올리버는 살구 'Apricot'의 진짜 뿌리가 라틴어 '프라이코쿰(praecoquum)'이라고 하면서 이 라틴어의 뜻이 '일찍 익는 것(early-ripening)', 즉 '조숙함(precocious)'이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엘리오의 조숙함을 대변하는 동시에 곧이어 겪을 뜨거운 사랑과 상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내에서 살구는 지적이면서도 절제됨을 상징합니다. 형태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은 엘리오의 여름 별장에서 벌어지는 이성적인 대화와 어울립니다. 게다가 동양에서 살구는 '학문'의 대명사입니다.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杏壇)에서 유래하여, 살구밭 그림은 학문적 성공을 의미했습니다.

반면 복숭아는 수분이 많고 부드러워 살짝 누르기만 해도 쉽게 멍이 들고 흐트러집니다. 이는 통제할 수 없이 터져버리는 끈적하고 원초적인 욕망과 닮아 있습니다. 복숭아의 생김새를 여성의 곡선미나 신체와 연결 짓고, 이를 풍요와 번식의 상징으로 삼은 직관성은 동서양을 막론합니다.

살구는 어원 그대로 초여름에 다른 여름 과일보다 먼저 익고, 복숭아는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살구와 복숭아는 엘리오와 올리버의 관계가 이성과 본능이 결합된, 결코 단순한 에로티시즘에 그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여름이라는 계절과도 닮아 있습니다. 살구가 먼저 익고 복숭아가 뒤이어 무르듯, 엘리오의 사랑 역시 지적인 호기심에서 시작해 욕망으로 깊어집니다. 여름이 끝나며 그 사랑에도 끝이 찾아옵니다. 조심스럽게 초여름 이르게 시작해 뜨거운 한여름에 무르익어 절정에 다다랐던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두 개의 과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인용 출처

  1. 표준국어대사전
  2. Wikipedia: List of Crayola crayon colors
  3. 위키백과: 살구색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살구나무

Film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

(Call Me by Your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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