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법정을 지배하는 색과 구조

영화 '추락의 해부'를 통해 낯선 프랑스 법정의 구조와 법복의 색채적 대비가 상징하는 의미를 살펴봅니다.

에디터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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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락의 해부(Anatomy of a fall)는 프랑스의 외딴 마을에서 벌어진 한 남편의 추락사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추락의 원인을 파헤치는 법정 공방 속에서 내밀한 가정사가 속속들이 해부되며 영화 내내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법정의 배경은 프랑스 그르노블 법원으로 설정되었는데요, 영미권 법정물에 익숙해진 저에게 프랑스 법정은 꽤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법복의 색채적 대비

법정 장면에서는 색채적 대비를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재판장과 검사가 입고 있는 붉은색 법복과 변호사가 입고 있는 검은 법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붉은색 법복과 검은색 법복 모두 라바(rabat)라고 불리는 하얀색 넥타이를 매는데요, 넓은 주름이 지어져 있는 이 라바는 법관과 변호사 모두 공정한 순수성과 중립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나타내는 순백색으로 통일하였습니다.

붉은색 법복과 검은색 법복

붉은 법복은 항소법원급 이상 — 즉 중죄재판소(cour d'assises)의 재판장이나 항소법원 소속 검찰 등이 입을 수 있는 색입니다. 역사적으로 붉은색은 왕의 색이었으며, 군주가 모든 정의의 원천이고 법관들은 그 권한을 위임받아 재판한다는 관념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재판장과 검사가 입은 붉은 법복은 이렇듯 국가 권력의 무자비함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검은 법복은 변호사들과 하급심(1심) 판사들이 입습니다. 다만 검은색 또는 붉은색 견장을 착용하는 식으로 세부가 갈립니다. 이 검은색 계열은 교회와 대학의 오랜 복식 전통에서 유래했으며,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의 단절'과 '법 앞의 평등'을 상징합니다. 영화 속에서 피고인의 곁을 지키는 변호사 뱅상이 바로 이 검은색 법복을 입고,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듯이 묘사됩니다.

프랑스 법정의 구조, 에슈비나주(échevinage)

프랑스 중죄원의 간략한 배석위치 프랑스 중죄원의 간략한 배석위치

또 하나 법정의 특이점은 판사와 배심원들이 반원의 높은 단상에서 나란히 앉아있는 구조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에슈비나주라고 하는 프랑스 법제사에서 유래한 독특한 재판 구조입니다. 에슈비나주는 전문 직업 판사(magistrats professionnels)와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또는 참심원, échevins)이 하나의 재판부를 구성하여 함께 판결을 내리는 형태를 말합니다. 과거 프랑스에서 지방 자치체의 대표인 '에슈뱅(échevin)'이 재판에 참여하던 관습에서 유래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판사와 배심원들이 중앙의 증언대를 내려다보며 심문을 합니다. 피고와 변호사는 한쪽에 따로 배석하고, 증인들은 반원의 중심에 서서 증언을 하는 식이지요. 이것은 상당히 위압감이 느껴지면서도 몰입감이 고조되는 구조입니다. 미국 영화에서 흔히 보듯 법관들만 단상에 위치하고 배심원은 따로 배심원석에 배석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느껴져서 법정 장면을 볼 때 흥미로운 차이점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낯선 땅 그르노블

그르노블은 지리적으로 프랑스 내륙 깊숙한 곳에 있으면서도 스위스, 이탈리아 국경과 맞닿아 있는 도시입니다. 주인공 산드라는 독일인이면서 프랑스인 남편을 런던에서 만나 프랑스에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산드라는 가족과도 영어로 대화하며 지냈지만 재판정에서는 이 부분을 배려해 주지 않고 대부분의 증언을 프랑스어로 하기를 강요받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보수적이고 고립된 도시와 낯선 법제 안에서 추궁받고 파헤쳐지는 모습이 도시의 특성과도 묘하게 맞물리는 듯 보였습니다.

산드라는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아들과 대중 앞에서 사생활을 낱낱이 해부당했습니다. 추락이란 단순히 남편 사뮈엘의 추락이라기보다, 그 죽음을 규명한다는 명목 아래 산드라의 서툰 언어와 결혼 생활 모두를 꺼내어 보여야 했던 또 하나의 추락이기도 했습니다.

인용 출처

Film추락의 해부 (2023)

(Anatomy of a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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